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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넷

우수소설 포켓몬 열전 2.그녀의 눈물

시랑 2008.06.09 12:33 조회 수 : 40

탕구리

비가 내리고 있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퍼붓던 비는 사흘이 지난 후에야 그 기세가 사그라졌다. 그리고 그 역시 빗줄기가 약해진 후에야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인식하지 못하면서 발을 내밀었다. 주인의 의사와 무관한 물건처럼 움직이던 그의 왼발은 젖은 자갈을 밟고 죽 미끄러졌다. 그의 몸통이 모래와 진흙에 내던져지듯 쓰러졌다. 하지만 그는 아픈 내색은 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아프지 않았다. 이미 아프다는 감각조차 옛 것이 되어버린 듯싶었다.
그는 몸에 진흙이 묻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투구 속으로 빗물이 스며들어오자 절로 진저리가 쳐졌다. 그는 일어나 투구를 벗어 던졌다. 투구는 커다란 바위에 팅 하고 부딪치곤 보이지 않는 곳으로 튕겨졌다. 그는 멍하니 그 장면을 보다가 다시 쓰러졌다. 투구 덕에 젖지 않은 머리와 얼굴은 금세 비와 진흙으로 범벅이 돼 버렸다. 그는 풀린 눈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았다.
저주스러웠다.
지난 사흘 동안 없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메말라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목에서 기괴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그렇게 진흙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었다.
빗줄기는 점점 약해졌지만 그치지는 않았다.
한참 후 그는 힘들게 몸을 일으키고 얼굴을 들었다. 비는 서서히 그쳐가고 있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잿빛을 띠고 있었다. 그의 앞에 펼쳐진 숲은 그의 눈물에 가려져 마치 물이 번진 수채화그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는 붓 씻는 물통을 그림 위에 엎지른 것처럼 보이는 이질적인 물체가 있었다.
이제 이틀. 벌써 이틀.
그는 이틀 전에 생긴 물체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목 밑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슬픔인지 증오인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슬퍼한다면 무엇을 슬퍼하고, 증오한다면 무엇을 증오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견딜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괴성을 질렀다. 한없이 무력한 자신이 견딜 수 없었다.

그는 무심하게 터벅터벅 걸었다. 원래 그의 앞은 떨어지면 즉사도 기대해 볼만한 높이의 절벽이었지만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위가 밀고 내려온 덕분에 내리막길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그 사실에 고마워 할 수 없었다. 그는 차라리 내리막길이 원래대로 되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녀도 돌아올 테니까.
내려오면서 미끄러운 자갈이나 모래 때문에 미끄러지고 나동그라지고 구르기까지 했지만 어쨌든 그는 끝까지 내려왔다. 참사의 흔적은 아직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 바위가 있는 곳까지에 있던 나무나 풀들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갔거나 땅 밑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바위는 나무들이 살신성인으로 지탱해 준 덕분에 멀리까지 굴러가지는 않았다.
그는 부러진 나뭇가지, 식물의 뿌리, 부서진 돌의 파편 따위를 밟으며 바위에 다가갔다. 그가 바위에 거의 다다랐을 쯤, 그것이 보였다. 바위로부터 몇 걸음 떨어져 있지 않은 땅에 하얀 무언가가 꽂혀 있었다. 그는 그것이 뭔지 알아차리고 서둘러 하얀 물체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것은 금이 간 뼈다귀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단순한 뼈다귀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장난치거나 싸우거나 그의 뒤통수를 후려칠 때 애용하곤 하던 뼈다귀였다. 그는 그녀의 뼈다귀를 뽑아냈다. 뼈다귀는 뽑히자마자 약간의 소리를 내며 세로로 갈라져버렸다. 그는 툭 하고 떨어지는 뼈다귀의 반 토막을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그의 뒤통수를 가격할 때마다 그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왔다. 그런데 썩은 나무토막만큼이나 허무하게 조각나 버리다니.
그는 한동안 무정물처럼 서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질 나쁜 장난 같았다. 혼이 빠져나갈 것 같은 장난.
그는 손에 들려있던 반쪽짜리 뼈다귀를 떨어뜨렸다. 이제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이 되어 버린 그는 그저 하늘을 보며 터벅터벅 걸었다. 비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얼굴 전체로 비를 맞으며 자신이 어디를 향해 걷는지도 모른 채 그냥 걸었다.
그는 나무와 몇 번 부딪치며 걷다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반사적인 행동으로. 그는 자신을 넘어지게 한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것은 튀어나온 뿌리도 아니었고 돌멩이도 아니었다. 어쨌든 식물의 뿌리나 돌멩이가 저렇게까지 새하얄 수는 없으니까. 그는 다시 반사적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아까 자신이 던져버린 것과 같은 종류의 투구였다. 하지만 그의 것은 아니었다. 새하얀 그 투구는 그녀의 것이었다. 몇 군데 금이 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투구는 멀쩡했다. 그의 눈에 초점이 제대로 맺혔지만 그는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갑작스런 폭우와 참사에 아무도 남지 않은 숲에서 긴 울음소리가 퍼졌다.

그는 서서히 일어섰다. 눈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퉁퉁 부었고 얼굴은 비와 진흙, 눈물자국으로 엉망이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투구를 들어올렸다. 그의 투구에 비하면 조금 작았지만 어쨌든 머리가 그녀의 투구에 들어갔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지막 빗방울이 투구에 떨어져,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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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많이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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