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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넷

우수소설 포켓몬 열전 5.잠드는 꽃잎

시랑 2008.06.12 10:07 조회 수 : 32

체리꼬

하늘이 잿빛 구름으로 뒤덮이자 포켓몬들은 그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 주변에는 많은 포켓몬들이 살고 있었기에 그들의 대규모 이동은 전쟁의 발발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들이 날아서, 달려서, 기어서 도망친 그곳에는 한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의 뿌리는 쓰러진 나무 한그루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굵었고, 줄기는 집 몇 채를 속에 간직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가지는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는 듯 하늘을 향해 넓게 퍼져있었다. 주변의 나무들을 관목으로 만들어버리는 그에게서는 성인들이 사람을 끌어당기듯 포켓몬을 이끌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줄기에서, 가지에서, 잎에서, 꽃에서는 항상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풍기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크기와 그가 살아온 세월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거창함을 버린 듯한 그의 분위기에서 그런 위엄이 서려나오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가지에서 체리꼬 하나가 통통 튀며 나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의 줄기에는 가지가 거의 없었기에 자칫하면 체리꼬가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체리꼬는 아랑곳 않고 그의 껍질 틈새를 밟아가며 마치 등산하듯 나무를 올랐다. 그녀는 마침내 그의 가장 굵은 가지 위로 올라섰다. 가장 굵지만 가장 낮은 가지였지만 그녀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그녀는 높은 산에서나 느낄 수 있는 고산증에 아연해 하며 잠시 숨을 골랐다. 높은 위치였지만 아직 그의 푸른 잎이 많아 숨쉬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한 체리꼬는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크게 외쳤다.
"왜 그들을 잡지 않으셨어요?"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말이었다. 모든 포켓몬이 떠나버리고 아무도 남지 않은 그곳에서 그녀의 말에 대답해 줄 포켓몬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어차피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대답이 들려올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
"아버지는 그들을 말릴 수 있었잖아요! 왜 그들을 그냥 내버려둔 거죠?"
바람이 불지 않았다. 높이가 높이이니만큼 강한 돌풍이 불어야 하겠지만 하늘을 짙게 덮은 구름 때문인지 바람은 불지 않았다. 그녀는 답답함을 느꼈다. 안 그래도 구름 때문에 어두운데 나뭇잎들이 남은 빛마저 가려버리니 그녀가 있는 곳은 매우 어두웠다. 그녀는 질릴 듯한 표정으로 다시 소리쳤다.
"웃기지 말아요! 아버지가 그들에게 베푼 게 얼만데! 겨우 며칠 해가 뜨지 않았다고 해서 아버지를 버릴 순 없다고요!"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배신이에요! 아버지를 먹이로, 장난감으로, 싸움터로, 생식과 주거 공간으로, 심지어 더러운 화장실로까지 여겨왔던 그들이 단지 하늘이 파란색이 아니라고 해서 떠나는 건 배신이라고요!"
그녀는 격정적으로 외쳤다. 그래서 그녀는 한동안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어디랄 것도 없는 곳을 노려보며 그녀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배신이 아니라면 뭐죠?"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린 채 천천히 호흡하고 있었고 바람은 불지 않았다. 그녀는 폐소공포증에 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위치한 곳이 어둡고 답답한 곳이기는 했어도 좁은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로 폐소공포증에 걸린 포켓몬처럼 얼굴을 구겼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누군가에게 대들며 말했다.
"알아요! 안다고요! 그들도 살려면 어쩔 수 없었겠죠! 하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잖아요! 저 저주스러운 구름이 낀 것은 불과 일주일 전이였어요! 곧 걷힐지도 모른다고요! 그런데 그들은 그런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고 아버지를 싸질러놓은 배설물마냥 쳐다보며 도망쳤어요! 그런 그들이…"
"이해타산적인 게 맞잖아요!"
그녀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더니 다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녀는 무서운 얼굴을 한 채 아무 곳이나 노려보며 식식댔다. 그녀는 문득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몸이 자꾸 움찔 대었다. 주변의 모든 것을 잡아먹을 듯 쳐다보던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쉰 후 체념 섞인 말을 내뱉었다.
"좋아요! 이제 됐어요!"
"이제 됐다고옷!"
그녀는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어떤 감정을 표출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곧 좌절과 분노가 그녀의 표정을 결정지었다. 그녀는 다시 어느 한 부분을 째려보며 외쳤다.
"하! 잘 아시네요?"
그녀는 몸을 조금 움추렸다.
"이제 절대로 나를 드러내지 않을 거예요! 이 더러운 세상 조금도 더 보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꽃잎들이 서서히 구부러졌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꽃잎이 금세 그녀의 몸을 가렸다. 분홍빛 꽃잎이 가려지고 칙칙한 색의 이파리만이 그녀에게 남았다. 그녀는 조금 만족했다. 하지만 또한 만족스럽지 않았다. 스스로를 가두게 한 세상과,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 잠을 자기로 했다. 강렬한 햇빛이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를 비추고, 보기 싫은 세상이 조금이라도 빛나는 날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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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다 더 짧아졌군요. ㅠㅠ
태클, 지적, 충고 등등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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