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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넷

우수소설 포켓몬 열전 8.추락하는 새

시랑 2008.06.17 08:41 조회 수 : 44

작은 번치코는 푹 파인 땅을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게 내려쳐야 저런 큰 구덩이가 생기는 걸까?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움츠린 것이 그의 목숨을 살렸다. 단단한 땅을 파고드는 위력의 발차기를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다면 아마 두개골이 깨져버렸을 것이다. 그는 서둘러 상대 번치코의 다리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상대 번치코는 기는 것처럼 피하는 작은 번치코를 보며 웃음 지었다. 애초에 작은 번치코는 그의 상대가 안 되었던 것이다.
작은 번치코는 몸이 매우 말랐다. 털색도 탁하고 구부러진 부리도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호전적이 번치코가 맞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비참한 표정이었다. 그에 반해 상대 번치코는 작은 번치코에 머리 위에 아차모 두 마리는 올려놓은 만큼 키가 컸으며 날카로울 수 있는 부위는 모조리 바위에 갈아 놓은 듯 서슬 퍼랬다. 털도 타오르는 불꽃마냥 붉었다. 둘의 싸움은 갓 태어난 아기 참새와 양도 잡아채는 매의 비상 대결 만큼이나 뻔했다.
큰 번치코는 작은 번치코가 어느 정도 거리를 떨어뜨릴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리고 작은 번치코가 다시 싸우려는 듯 팔에서 불꽃을 튕겨내자 '호오'하는 표정을 지으며 조금 가지고 노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큰 번치코가 앞으로 튕겨졌다. 작은 번치코가 움찔하는 사이에 그의 발차기가 세 번 명중했다. 위력이 약했는지 작은 번치코는 뒤로 밀려나긴 했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그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톱을 세워 그에게 달려들었다. 한숨이 나올 만큼 조잡스런 반격이었다. 큰 번치코는 뒤로 슬쩍 물러나며 공격을 피했다. 그의 얼굴 앞 몇 센티의 허공을 허우적대며 긁던 작은 번치코는 그만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우당탕 소리가 날 만큼 요란하게 넘어진 작은 번치코의 등을 큰 번치코의 발이 덮었다. 그저 발 하나일 뿐인데도 작은 번치코의 등은 대부분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작은 번치코는 작은 신음을 하며 일어나려 애썼지만 바위 같은 상대의 발에 힘을 쓸 수 없었다. 큰 번치코는 웃으며 말했다.
"재밌었지? 이제 저 영치코는 포기할래?"
작은 번치코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상대의 얼굴을 향해 불길을 내뿜었다. 큰 번치코는 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 불길을 고스란히 받았다.
"네놈의 불엔 타지 않아."
작은 번치코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큰 번치코를 덮친 불은 그저 반항심의 표현일 뿐이었을 것이다. 큰 번치코는 발에 힘을 주었다. 작은 번치코의 신음이 점점 커졌다. 그는 작은 번치코가 울며 살려달라고 외칠 때까지 계속 누르고 있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큰 번치코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암컷 영치코 한 마리가 멀뚱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암컷 영치코는 생김새나 분위기 조금 독특했다. 다른 영치코들 보다 조금 작은 몸집이었지만 볏은 누구 못지않게 크고 색이 뚜렷했으며 부리는 둥근 편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위협적으로 보였다. 손톱과 발톱은 조금만 다듬으면 훌륭한 무기로 거듭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특이한건 그녀의 털색이었다. 다른 영치코들이 대개 노란색을 가지는 부분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고 평범한 영치코들이 붉은 털을 가지는 부분은 오히려 노랬다. 결과적으로 위아래가 바뀐 듯한 모습이었다. 일반적으로 평범에서 벗어난 모습이나 행동을 하는 자들은 무리에서 버려야 할 존재가 되고 저주와 공격의 희생물이 돼야 하지만 큰 번치코는 그녀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겉모습은 괴이하지만 조금만 다듬으면 그 누구보다 강한 영치코, 아니 번치코가 될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강한 아차모들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큰 번치코는 발에 힘을 주며 작은 번치코가 그녀의 가치를 알아봤다는데 호기심을 느꼈다.
작은 번치코는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약했다. 어떻게 번치코까지 성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항상 싸움을 피하는 성격이었고 싸우면 지는 쪽에 속하는 열등한 존재였다. 무리가 이동할 때는 항상 맨 뒤에서 빌빌거리며 쫓아왔고 좋은 보금자리를 찾아도 항상 불편한 자리에서 자야했다. 물론 강한 종자를 남기는 것을 중히 여기는 그들이기에 작은 번치코는 생식의 권리조차 박탈당했다. 그런 그가 숨겨진 힘을 가지고 있는 영치코를 알아보고 접근했다? 있기 힘든 일이다. 아마도 무리에서 배척당하는 동지라는 생각에 다가간 것이겠지. 큰 번치코는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작은 번치코의 허리를 부러뜨려 놓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때 그는 작은 번치코에게서 발을 뗄 수밖에 없었다. 작은 번치코를 압박하고 있던 왼쪽 종아리에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남은 발로 뒤로 껑충 뛰며 그는 작은 번치코를 보았다. 그의 손에는 작지만 날카로운 돌이 쥐여 있었다. 큰 번치코는 고개를 숙였다. 종아리에서는 그들의 털색과 비슷한 색의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작은 번치코에게 입은 상처는 다리의 상처보다 자존심의 것이 컸다. 번치코는 상처 입은 발을 살며시 내려 보았다. 서있기 힘들었다. 저 정도 돌에 뼈까지 다치진 않았겠지만 근육이나 신경이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 큰 번치코는 눈을 부라리며 작은 번치코를 노려보았다.
"네놈은 자존심도 없냐? 정당한 싸움에 무기를 들어?"
사실 그들의 싸움에 정당함은 없었다. 몸 자체가 무기인 그들이니 처음부터 진검과 나뭇가지의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 나뭇가지에 못이 하나 박혀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그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방심해서 못에 긁혔다는 진검의 변명에 창피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는 대신 말이 담겨있는 그릇을 없애기로 했다. 발 하나를 쓰지 못하게 됐지만 그에게는 아직 무기가 많다. 그는 몸을 조금 낮춘 후 오른발에 힘을 주었다. 곧 팽팽히 당겨진 근육이 폭발하며 그가 대포알같이 쏘아졌다. 놀란 작은 번치코가 쥐고 있던 돌을 던졌지만 그의 왼손에 튕겨나갈 뿐이었다. 그는 쫙 핀 오른손을 조금 오므렸다. 날카로운 세 개의 손톱이 작은 번치코를 향해 날카롭게 반짝였다. 작은 번치코는 자신이 틀림없이 저 세 갈래의 흉기에 갈가리 찢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작은 번치코의 무의식은 판단했고, 행동으로 옮겼다. 몸을 움츠림과 동시에 그의 왼발이 쭉 뻗어나갔고 그것은 정확히 큰 번치코의 오른쪽 팔목에 걸렸다. 작은 번치코가 속으로 환호했고, 큰 번치코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는 작은 번치코의 발이 걸려있는 오른손을 뒤로 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들에게는 부리라는 흉포한 무기가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작은 번치코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두 팔을 당겼다. 하지만 그것은 충분히 빠르지 못했고, 큰 번치코의 부리는 어김없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고 피가 튀었다.
그리고 아기 참새가 잠깐이나마 날았다.
방어를 위해 당겨진 두 팔은 공격을 위한 좋은 위치에 있었고 뭉툭한 여섯 개의 손톱이 큰 번치코의 얼굴을 할퀴었다. 다른 번치코에 비해 뭉툭하단 소리지, 그래도 상대의 피부를 잡아 뜯는 데는 모자람이 없었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된 큰 번치코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슴을 쪼인 번치코는 뒤로 나동그라졌고 다리를 다친 번치코는 상대 번치코 위로 떨어졌다. 큰 번치코는 이상한 느낌에 곧바로 상체를 일으켰다. 밑에서는 작은 번치코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무리 약해도 번치코는 그 정도 일격에 죽지 않는다. 큰 번치코는 얼굴 전체가 떨어지는 것 같은 통증과 부리를 타고 흐르는 피를 보고 어리둥절해 하다가 잠시 후 분노했다. 그는 한 발로 일어서며 분노의 함성을 질렀다. 완전히 일어서 큰 함성을 한 번 더 지른 큰 번치코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부리를 열고 화염을 토해냈다. 광선처럼 쏟아지는 화염에 작은 번치코의 피는 끓을 새도 없이 곧바로 승화해 버렸고 털들은 모두 오그라들었다. 타지 않는 겉피부와는 달리 그들의 속 피부는 다른 포켓몬들과 다를 게 없다. 열기는 상처를 헤집으며 속 피부를 죄다 태워버렸다.
큰 번치코는 이제 말이나 글로는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바뀐 상대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남은 발로 통통 뛰며 영치코에게 다가간 그는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팔을 홱 낚아채고는 무리가 있는 방향을 가늠하며 나아갔다.
다친 새는 상처가 나으면 다시 날 수 있지만 짧은 날개를 가진 새는 아무리 노력해도 날 수 없다. 그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날지 않으려는 큰 새를 곧 자신의 힘으로 날게 할 것이라는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번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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