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마그넷

"사랑해, 탄."
탄은 쌍둥이 누이의 말에 경악했다. 산은 대답을 기다리는 듯 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 탄은 대답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고, 그래서 대답했다.
"누나, 미쳤어?"
"때로는 그렇기도 하지."
탄은 그제야 맥이 탁 풀렸다. 그녀는 농담을 한 것이다. 보통은 구별하기 어렵지 않지만 그녀가 워낙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서 오히려 구별하기 어려웠다. 탄은 한숨을 쉬며 누나가 왜 그런 충격적인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누나가 어떤 말을 협박하고 어떤 말로 구슬리고 어떤 말로 농담을 하든지 나는 안 갈 거야. 그리고 누나가 가는 것도 막을 거야. 자살행위니까."
"그럼 더더욱 널 끌고 가야겠네. 혼자서 죽는 건 쓸쓸하니까."
탄은 혼자 죽고 싶지 않아 동생을 죽이겠다는 누나에 말에서 합리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누나는 가끔씩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쌍둥이는 태어날 때도 함께였으니 죽을 때도 함께여야 한다고 외치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는 누나의 머리에 큰 혹을 만들어주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산의 머리를 두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럴 기력도 없었다.
"누나, 이제 제발 포기해. 더 가봐야 설인은 만날 수 없을 테고 저승사자만 만나게 될 거야. 누나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이제는 살아 돌아가는 것까지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어. 그런데 앞으로 더 나아가자고? 정말 다 같이 죽자는 거야?"
"왜 죽는다는 거니? 식량은 아직 잔뜩 남았잖아."
"그리고 연료는 다 떨어져가지. 이젠 먹을 거랑 같이 얼어붙게 생겼단 말이야. 사람들도 거의 다 도망쳤어."
산은 한동안 탄의 눈을 노려보며 침묵했다. 탄은 그녀의 눈에서 의지와 믿음으로 읽힐 수 있는 반짝임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고집과 억지라고 해석하기로 했다. 탄은 결국 누이를 기절시켜서라도 돌아가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고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천막 밖에서 비명소리가 났다. 탄과 산은 서로를 바라보고는 눈으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천막 밖으로 튀어나갔다.
눈을 실은 차가운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불평할 수 없었다. 그런 것에 불평을 한다면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장면에는 저주보다 강한 것을 보내야 할 테니까.
탄은 '그것'에 다가가려는 산의 손목을 재빨리 낚아채고 뒤로 돌아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천막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다시 나왔다. 무릎까지 쌓인 얼음덩이들과 방향을 바꿔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달리기가 힘들었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산은 탄에 이끌려 도망가고 있긴 했지만 눈은 계속 '그것'에 쏠려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더듬거리며 열렸다.
"설인이잖아?"
탄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그녀만큼 설인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는 절대로 '그것'만은 설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설인이 이 얼음뿐인 땅에서 풀을 자라게 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는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그의 주변에서는 처음 보는 식물이 쭉쭉 자라나는 것을 확실히 보았다.
탄은 듣도 보도 못한 생물체의 등장에 그저 두 다리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산의 다리는 탄의 다리처럼 튼튼하지 않았다. 탄은 몸이 뒤로 홱 쏠리는 것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산이 눈에 걸려 넘어져 있었다. 탄은 서둘러 산을 일으켰다. 산이 천천히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탄은 답답함을 느꼈다. 이런 둔탱이 누나가, 정말 같이 죽자는 건가? 탄은 다시 산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꼼짝도 못했다. '그것'이 다가온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은 그의 바로 앞에 있었다. 탄의 '그것'과 눈을 맞추려면 고개를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의 눈이 눈보라 속에서 빛났다.
"야아"
탄은 그 감탄사를 누나가 내뱉었다는 것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지금의 상황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탄은 왜 그 감탄사에 공포나 의구심 등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지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누이는 학자다운 순수함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탄은 할 수 없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떤 생물이 보랏빛 홍채를 가지고 있을까? 눈처럼 새하얗고 팔뚝 굵기 정도가 아닐까 싶은 짙은 눈썹을? 그리고 서까래 같이 생겼지만 색이 전혀 다른 푸른색 손과 발을? 하하, 저 덩치는 차라리 하마에 비교하는 게 낫겠군. 게다가 저 꼬리는 뭐야? 마치 엄청난 크기로 확대해 놓은 쐐기 같잖아? 한 번 휘두르기라도 하면 어지간한 나무 정도는 그냥 쓰러지겠군.
탄은 자신과 누이의 몸이 나무보다 단단할 거라고 믿지 않았다. 하지만 '저것'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고도 믿지 못했다.
'제길, 정말 누나 말처럼 되게 생겼군.'
탄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어쨌든 지금 당장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것 같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오래 살려면 지금 도망쳐야 했다. 그래서 그는 산이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며 좌절했다.
산은 마치 신성한 무엇을 보는 것과 같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한 발자국 내딛었다. 탄은 소리쳐 그녀를 부르려고 했지만 그래도 되는 것인지 몰랐다. 지금은 그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얌전히 있었지만 그의 외침에 놀라 저 우악스런 팔이나 꼬리 중 하나를 휘두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제 '그것' 바로 앞에 가 있는 그의 누나는 다시는 그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희한하게도 그는 그것이 무척이나 맘에 걸렸다.
'그것'이 움직였다. 눈발이 거세져 확실하진 않았지만 탄은 '그것'이 움직였다고, 그리고 아직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뒹굴 각오로 허리를 굽혔다. 굵은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그것'의 팔이 휘두르는 타이밍에 잘 맞춰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물론 그까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것'이 팔을 내리친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몸을 튕겼다. 하지만 눈들이 그의 발목을 잡아채었고 그래서 그는 그녀의 허리가 아닌 발목만 가까스레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아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그의 예상대로 상체가 날아간 누이가 있지 않았다. 산은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가? 마치 '그것'과 악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탄은 몸을 일으키며 산이 정말 '그것'과 악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악수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보다 더욱 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의 팔이 산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커다란 애완동물을 쓰다듬듯 '그것'의 팔을 정성스레 쓰다듬고 있었다. 탄은 입을 쩍 벌렸다.
'그것'의 팔을 쓰다듬던 산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탄을 보고 누나답게 경고했다.
"입 닫아. 이 날씨에 그러고 있다간 혀를 잘라내야 할거야."
그리고 탄은 누나의 말을 잘 듣는 동생을 흉내 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산의 동생답게 누나에게 말했다.
"미쳤다는 말로는 설명이 안된다는 거 알지?"
산은 싱긋 웃고는 천막을 가리켰다. 그곳으로 돌아가자는 의미 같았다. 실제로 산은 '그것'의 팔을 붙잡은 채 안내하듯 천막을 향해 걸었다. 탄은 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은 얼굴을 한 채 그들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탄이 죽어라 도망친 거리가 10m정도 밖에 안된다는 사실에 정말 죽을 듯이 굴었다.
산은 눈 속으로 파고들려는 탄을 무시한 채 '그것'과 함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바람만 불지 않지 천막 안 역시 바깥 못지않게 추운데도 그녀는 덥다는 듯이 손부채질을 하며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온 '그것'에게 고개를 돌렸다. 산은 왠지모르게 '그것'이 쓸쓸해 한다고 느꼈다. 그녀는 잠깐 사이에 몸에 엉겨 붙은 눈들을 털어내며 '그것'을 관찰했다.
산의 눈에도 '그것'이 설인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 사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것'과 설인의 공통점은 하얀색 털 뿐이었다. '그것'은 두발로 걸었지만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고 꼬리가 있었지만 원숭이나 기타 어떤 동물과도 닮지 않았다. 산은 탄에게 의견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혐오에 죽을 듯한 얼굴로 뒤늦게 천막 안으로 들어오던 탄은 산의 의견에 맞장구 쳐줬다. '그것'은 설인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동물도 아니다. 산은 새로운 생명체의 발견에 날듯이 기뻐했으나 탄은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밖에서와는 달리 침착함으로 '그것'을 찬찬히 관찰하던 그는 정말 날려고 하는 듯한 산에게 말했다.
"누나, 아니야."
'그것'과 키를 맞추려고 탁자 위에 올라갔던 산은 뭐가 아니냐는 눈짓으로 탄을 내려보았다. '그것'도 그녀를 따라 탄을 보았다. 탄은 이제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말했다.
"이건 지구상에 존재 할 수 없는 생물이야. 아니, 생물이 맞긴 한가? 마치 누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로봇? 아니야. 로봇은 결단코 아니야. 하지만 정말 생물도 아니라고. 어떤 생물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순 없어. 식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부터가…"
탄은 숨이 턱 막혔다.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단어 하나가 그를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산이 말을 멈추고 멍하니 서있는 탄의 머리를 발로 차볼까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그의 입에서 말이 새어나왔다.
"신인가?"
산은 깜짝 놀라 탄의 머리를 차버리려는 생각을 날려버렸다. 탄으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아니면 신의 애완동물인가? 맙소사, 식물을 맘대로 다뤘어. 흙 한 줌 없는 이 땅에 식물을 자라게 할 수 있는 건 신이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가 아닌 이상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물이고 말고가 아니야. 이런 젠장, 우리가 대체 뭘 발견한 거지?"
산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조금 후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세상이 멸망하려는 걸까?"
"모르지. 세상에 이런 게 또 있다면 정말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거야."

그들이 세상이 무너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눈설왕-

------------------------------------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눈밭에서 조난당한 인간을 눈설왕이 구해준다는 식이었는데 어느새 새로운 소설을 쓰고 있더군요.
그에 맞춰 쓰고 다시보니 제가 예전에 구상하던 소설과 비슷하단 것을 깨달았습니다.
현재 지구에 포켓몬이 하나둘 나타난다는 스토리였지요.
차원이 일그러지고 어쩌고 하는 스토리였는데...
음, 눈설왕을 주제로는 하나 더 써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겠습니다. ㅠㅠ
다른 스토리의 소설을 써버리다니...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