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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넷

우수소설 포켓몬 열전 12.투지

시랑 2008.06.23 12:32 조회 수 : 30

나는 당혹했다. 이러한 상황은 익숙하고 익숙하지 않고를 떠나서 역사상 처음으로 일어나는 일일 테니까. 이러한 일을 처음 맞이하는 니드퀸으로써 나는 애매한 웃음 이상은 표현하지 못했다.
상황은 간단하지만 정황을 설명하기 전에 우리들의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우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싸움꾼이다. 그렇지 않은 포켓몬이 어디 있겠냐마는 우리는 싸움에 좀 더 진지하고 경건한 마음을 가진다. 그렇기에 우리의 자손은 우리보다 강해야 하고 그들의 자손은 더욱 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유전자만이 물려져야하고,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니드킹들이 취하는 행동은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우는 일이 된다. 난폭한 방식이나, 신성한 의식이나 다름없다. 살아남기 위한.
거창한 듯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거의 모든 포켓몬이 채택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사실에 만족하고 익숙하다.
여기서 내가 당혹한 이유가 나타난다.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담담한 사실의 토로인데, 나는 근처 니드퀸 중에 가장 강한 니드퀸이다. 이런 나를 원하는 니드킹들은 잔뜩 있고, 그들은 싸움으로써 나를 차지하려 한다. 그리고 그중 가장 강한 니드킹이 나와 맺어지는 것이다.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고 실행되어야할 사건인데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기진맥진한 채 나를 바라보는 두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꽃다발 뒤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네 개의 검은 눈동자를 보았다. 나는 말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도 하기 싫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니드킹 뒤에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너부러져 있는 여섯 마리의 니드킹들을 보았다. 동정심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동정을 받고 싶다.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 허리에 손을 얹고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둘은 서로를 마주보더니 거의 동시에 말했다.
"구혼이지."
머리가 어지럽다.
"그럼 그건 뭐야?"
"꽃이지."
붉은색 꽃만 잔뜩 꺾어온 녀석이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말했다. 유난히 길고 굵은 뿔이 멋진 녀석이다. 뒤에 너부러져 있는 니드킹 중 셋은 이 뿔 때문에 평생 갈 상처를 얻었다. 영광스런 상처겠지만.
"내가 묻고 싶은 건…"
"선택해."
황색 카틀레야를 안고 있는 니드킹이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나는 잠시 그 꽃의 꽃말을 생각해내고 속으로 비웃었다. 카틀레야라면 복숭아 색을 가져왔어야지. 그래도 녀석은 확실히 강했다. 긴 두 팔을 교묘히 이용해 번번이 상대의 움직임을 막곤 했다. 그래서 녀석의 몸에는 상처가 거의 없다.
녀석들이 싸우면 어떻게 될 지 궁금하다. 긴 팔로도 저 뿔은 막기 어려울 테니 뿔이 멋진 녀석이 유리할 수도 있겠지만 녀석은 공격이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팔이 긴 니드킹이 상대를 간단히 제압할 지도 모른다. 빨리 싸워줬으면 좋겠는데 녀석들은 자신의 강점을 드러내는 대신 꽃만 내밀고 있다.
"왜 싸우지 않지?"
나는 조금 간격을 두고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싸우고 싶지 않아."
뿔이 긴 녀석이 말했다.
둘은 명실상부하게 강한 니드킹들이다. 니드킹 셋을 연속으로 쓰러뜨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둘은 호흡이 가쁘지도 않았다. 뿔이 큰 니드킹은 상처가 나긴 했어도 별것 아니라는 듯 태연하다. 그런 니드킹들이 투지가 없다?
"그게 대답이 된다고 생각해?"
"그럼 어떤 대답을 원하지? 우리는 싸우기 싫다. 싸우기 시작하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을 테고 나머지 하나도 빈사상태가 될 거야. 운이 나쁘면 둘 다 죽을 수도 있지. 너 같은 니드퀸을 목전에 두고 죽고 싶진 않아."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고민했다. 해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잠깐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가고 나는 선택했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죽는 게 두렵나?"
니드킹들은 움찔했다. 녀석들은 투사답게 송곳니를 드러내며 얼굴을 구겼다. 흉포한 니드킹의 얼굴이다. 흥, 이제야 어울리는 표정을 짓는군. 팔이 긴 녀석이 사납게 말했다.
"나는 니드킹이다. 죽음 따위가 나를 위협할 순 없다."
"죽음이 너 따위를 위협할 생각이나 있을지 모르겠군."
카틀레야가 후두둑 떨어졌다. 그리고 그 위로 큰 발이 떨어졌다. 녀석의 얼굴은 흉포하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한 얼굴이 되었다. 녀석의 팔이 떨린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태세다. 나는 녀석을 무시하고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뿔이 큰 녀석에게 말했다.
"너한테도 해당되는 말이야. 아니, 말이 너무 어려워서 니드런 뿔보다 작은 네 뇌로는 이해하지 못하나?"
철쭉이며 범부채등이 하늘을 날았다. 뒤늦게 옆의 니드킹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녀석을 낮게 으르렁거렸다. 녀석의 뿔이 나를 향한다. 나는 두 니드킹의 얼굴에 침을 뱉듯 말했다.
"한심한 녀석들, 덤벼."
산이 일어나 덤비는 기세로 두 니드킹이 달려들었다.

나는 손을 마주 비볐다. 굳은 피가 가루가 되어 떨어진다. 역시 간단한 싸움은 아니었다. 큰 뿔을 앞세운 돌진은 몸을 꿰뚫을 기세로 무섭게 다가왔고 긴 팔은 길이를 이용한 까다로운 공격으로 움직임을 봉쇄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나에게 이길 수 없었다. 죽을 각오로 싸우지 않는 녀석은 전사도 투사도 아니다. 그저 힘을 휘두르는 불량배일 뿐이다. 나는 한심한 생각에 한숨만 쉬었다.

-니드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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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한숨만 나오는군요.
힘들기만 힘들고 결과가 나오질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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